칼럼

<좋은 이야기>- 함석천/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내외정보센터 제공)

Diane 06.12 15:57

쉽게 현명해지는 방법, 걷기

  (함석천/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 201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의 노래 ‘Blowing in the Wind’의 첫 소절입니다. 이 노랫말처럼 우리는 사람이라고 불리기 전까지 무수히 많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걸을 수 있었기에 편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발로 걸으며 얻게 된 두 손의 잉여로 도구를 만들고 불을 다루며 꾸준히 뭔가를 창조해 왔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걸으면서 생각하고, 그러면서 진화해 왔습니다.

 

“내가 치는 음표는 다른 피아니스트와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음표 사이의 정지, 그렇다. 바로 그곳에 예술이 존재한다.” 피아니스트 아르투어 슈나벨의 말입니다. 이 말처럼 걷기란 제 삶에서 쉼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풀기 어려운 사건과 분쟁이 이 땅에서 생겨나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진실의 입은 너무 커서 사실을 주장하는 수많은 사람의 손들이 그 입안으로 들락거립니다. 그사이에서 판사는 진실을 가려야 합니다.


그 무게감이 숙명보다 무거운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저는 걷습니다. 걷다 보면 사건과 단절되고, 그 단절이 오히려 사건 해결에 실마리를 던져주기도 합니다. 풀리지 않는 난제를 걸으면서 풀어갔던 경험을 꽤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업무의 연장인 셈입니다. 그래도 머릿속에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어내면서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걸으면서 이보다 더 심오한 일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걸으면서 철학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철학은 삶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왕의 스승 역할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이라는 사설 학원을 세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과 매일 아침 산책을 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이 모임을 ‘소요학파’ 또는 ‘페리파토스학파’라고 불렀습니다. 소요는 “자유롭게 이리저리 슬슬 거닐며 돌아다님”이란 뜻입니다(표준국어대사전). 페리파토스는 산책길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소요학파는 ‘걷기학파’인 셈입니다. 서구 근대 사상의 근원이 된 학파의 일상이 공부가 아니고 걷는 일이었다니, 현대를 사는 우리, 그리고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걷기처럼 격렬하지 않은 운동이 창의성을 기르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어린아이 때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신경세포는 계속 만들어지는데, 걷기 같은 운동이 그 생성을 돕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정재승 <열두 발자국>).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암 사망의 3분의 1은 조기검진으로, 또 3분의 1은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예방이 가능한데, 주 5회 이상 꾸준히 걷기만 해도 새로운 세포가 생성되고 암세포는 소멸한다고 합니다(EBS 라디오 캠페인). 


걷기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신체 활동이자, 다양한 두뇌 활동이 덤으로 따라오는 꽤 괜찮은 선택입니다. 따로 운동할 시간을 낼 수 없는 현대 도시 생활에 걷기처럼 간편하고 효율적인 신체 활동은 없는 것 같습니다(생계 활동으로 따로 걸을 시간을 내지 못하는 분들께는 양해의 말씀 구합니다).


철학의 역사, 누군가의 조언, 연구 결과가 알려주듯이, 사람은 걸으면서 현명해졌습니다. 자연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속에 인간이 만든 건축이 얼마나 볼만한지, 내 앞을 사뿐히 지나는 고양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걷다 보면 보입니다. 어느 시인이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뒀던 저녁 거리마다, 어릴 적 뛰놀던 종로 골목마다, 뽀얀 우윳빛 숲속에, 그리고 북녘 땅 천지와 명사십리에 여러분의 발길이 닿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고위 공직자와 기업 임원들에게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차에서 내려서 걸어 다니기 바랍니다. 걷다 보면 세상이 보이고, 그러면 나라와 기업 모두 현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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